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을 지정하고 보존하는 국제 제도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순한 보존을 넘어선 국가 간 정치적 갈등, 역사 해석의 충돌, 문화 패권주의 논란이 숨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단순한 문화유산을 넘어서, 어떤 정치적 의미와 상징, 갈등 요소를 지니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세계유산 지정: 문화 보존인가 국가 브랜드인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는 1972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을 통해 출범했으며, 2024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1,200건이 넘는 문화·자연유산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실제로는 각국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국가 정체성 강화, 외교 전략 확대, 관광 산업 육성 등 다양한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프랑스는 루브르 박물관을 통해 ‘문명의 중심지’라는 이미지를 강화하고, 중국은 장성이나 실크로드를 통해 ‘문명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한국도 조선왕릉, 해인사, 백제역사유적지구 등을 통해 ‘민족 정통성’과 ‘문화적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유산 등재는 문화 자산을 활용한 소프트 파워 외교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각국은 유산 등재를 통해 국가 브랜드와 국제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등재를 둘러싼 정치적 로비, 역사 왜곡 논란, 다문화주의 배제 등이 발생하며, 세계유산 제도 자체의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유산을 둘러싼 갈등: 역사 해석과 민족주의의 충돌
세계유산 등재는 국제적인 명예이자 보호 대상이지만, 동시에 역사 해석의 장(場)으로 기능합니다. 특히 동아시아, 발칸반도, 중동 등 역사적 긴장이 잦은 지역에서는 유산 등재 자체가 외교적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메이지 시대 제철소 등) 등재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이 시설들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이 투입됐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유산 신청서를 제출했고, 한국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유네스코는 등재는 허용하되 ‘전체 역사 맥락을 반영하라’는 조건을 붙였으나, 실제 이행은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예루살렘 구시가지 등재 문제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를 이슬람과 아랍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지만, 이스라엘은 유대교적 정체성을 부정한다며 반대하며, 유네스코를 탈퇴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세계유산 등재가 단순한 문화 이슈가 아니라, 민족주의, 종교 분쟁, 국가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결국 세계유산은 누가 역사를 말할 권리를 갖는가라는 질문과 직결되며, 유산의 ‘보편적 가치’라는 명제가 때때로 특정 정치 이념과 결합해 편향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문화유산의 지정과 식민주의의 재해석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 하나는 식민주의적 관점의 잔재입니다. 초기 세계유산 지정은 유럽 중심의 고전 건축, 종교 유산, 왕궁 중심이었고, 비서구 국가의 문화유산은 ‘이국적 유물’이나 ‘원시적 유산’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서구의 기준으로 타 문화를 평가하는 문화적 패권주의(Cultural Imperialism)의 형태였습니다.
예컨대, 많은 아프리카 유산은 물리적 유물보다 구전전통, 춤, 언어, 공동체 규범 등의 비가시적 유산인데, 이는 기준 미달로 간주되거나 늦게야 등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무형문화유산 제도를 도입하고, 공동체 참여형 심사 방식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심사 기준, 언어,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비서구권은 불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또한 유산의 소유권 문제도 논란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 박물관에 있는 이집트 미라나 베넹 청동상은 본래 해당 국가의 유산이지만, 식민지 시절 반출된 이후 지금도 반환되지 않은 채 전시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유물 반환 권고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법적 강제력이 없어 현실적인 해결이 어렵습니다. 이는 문화유산이 정치적 주권과 연결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결론: 유산은 기억이며, 외교의 도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단순한 보존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의 얼굴이자, 외교의 언어이며, 역사 해석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세계유산을 통해 ‘어떤 역사가 기억되고, 어떤 목소리가 배제되는가’를 묻고, 문화유산 제도 자체의 공정성과 다양성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세계유산은 과거를 기념하는 동시에, 현재의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진정한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의 다양성과 역사적 진실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며, 정치적 도구가 아닌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기능해야 할 것입니다.